천주교 신부나 목사, 스님들 혹은 원불교 원사님들은 농부나 어부, 노동자들처럼 무엇을 가꾸고 기르는 생산자(生産者)가 아니다. 가정을 꾸려 자식을 길러 자자손손(子子孫孫)을 잇게 해주는 사람들도 아니다. 그들은 중생의 덕을 입고 백성의 보살핌을 받고 사는 자들이요, 절대 소비자들이다.
그래서 신부님이나 스님들, 원사님들은 중생 혹은 백성들이 갖다 바치는 것을 먹고 입고 쓰며 산다. 이렇게 갖다 바치는, 혹은 하늘과 사람이 내려주는 모든 것을 시물(施物)이라 한다. 베풀 시(施)에 물건 물(物) 자를 쓰며, 이를 헌금 또는 기부(寄附)라고도 부른다.
이 시물(施物)을 바치는 자는 부자만이 아니다. 때론 가난한 사람들이, 때론 억울하고 한 많은 사람들도, 늙은 노인도 어린 아이도, 한결같이 세상의 평온과 구복(求福)을 바라면서 내는 것들이 모두 시물(施物)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요즘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신부들이며, 스님들이 좌파들과 합세하여 촛불집회를 벌이는 광경을 목격하고 나는 고개 숙여 한참이나 생각한 적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바치는 시물(施物)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 시물(施物)에 대해, 어느 책에서 읽은 사명대사의 입산기(入山記)가 문득 떠오른다.
- 산길을 가다 보니 왠 중이 헐레벌떡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곁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인 일인고 싶어 지켜보니, 그 중은 계곡물에서 배춧잎 하나를 건져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그 중은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내가 그 중이 간 길을 따라 가 보니 암자가 나오고, 거기까진 무려 십리나 되는 길이었다. 내가 그 중에게 물었다.
“십리나 되는 길을 고작 배춧잎 하나 주우려고 내려오셨습니까?”
그러자 그 중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세상이 내리는 모든 것이 시물(施物)이거늘, 중이란 무릇 공짜로 그것을 먹고 사는 자들이다. 어찌 배춧잎 하나라도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더냐.”
나는 그 말을 듣고 入山을 결정하였다. -
중이란, 무릇 공짜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중이 되려면 배춧잎 하나라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소위 수도자의 기본자세라는 것이었다. 천주교 신부도 원불교 원사들도 예외일 수 없는 이야기다. 그것은 한 마디로 평범(平凡)의 진리, 구도자(求道者)의 진리였다.
그러나 세태가 변하여서인가. 아니면 내가 어리석어서인가. 修道者들이 수도에 힘쓰지 않고 길거리로 나오는 행위를 이해할 수 없었다. 世俗人들보다 오히려 수많은 財貨를 쓰고,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위 백성들이 바치는 것을 먹고 산다는 사람들이 그 백성들 위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스탕달은 그의 소설 ‘赤과 黑’에서, 중세 유럽의 온갖 부정부패, 피의 음모에 신부들이 있음을 고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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