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성일 배우 장례식장에서 박종명이 만난 엄앵란 박동규 이덕화 김국현 장미희 태현실 김진양 지상학
▲ 엄앵란 여사님과 박종명 필자
▲ 강신성일님 빈소에 찾아가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었습니다.
필자가 지난 총각시절에 호텔학교를 나와 온양관광호텔에서 몇개월
실습을 받던 그 당시에 온양관광호텔 2층 레스토랑에 빨간 승용차를 타고
가족들이 함께 놀러 와서 식사를 하시던 모습을 지켜보고는 팬이 되었다.
실습을 몇개월 마치고 서울 장충동 호텔 앰배서더애 근무할적에는 문희
유명배우의 남동생 약혼식이 있어서 본인이 행사를 도와줄때 신성일 엄앵란
부부가 하객으로 참석해 두번째 뵙고 나의 동경의 대상 인물이 되었다.
세번째 만남은 세종문화회관에서 고 김종필 전총리님 출판기념회에 강신성일
배우께서 참석해 기념사진도 담아보고 자리에도 앉지않고 게속 서서 행사를
보고 게시기에 유동근 배우옆에 빈 자리가 하나 있어서 앉으시라고 권유하니
자신은 운동을 매일 하기때문에 서 있는게 편하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행사가
거의 끝날때까지 서 있다 행사장을 나가시던 건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당시에 공개한 김종필 총리님 출판기념행사 뉴스에 이 내용을 공개 한 일이
생각되어 그 만남이 고인과의 만남 마즈막이 되었기에 아쉬움이 너무나 많다.
지난 일이지만 폐암 선고를 받으신 후 자신은 체력을 단련 몸 관리를 잘해
페암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에 감동을 받아 건강하시기를 기원했다.
며칠전 방송 된 김수미 마이웨이에 출연하시여 김수미 배우와 함께 출연
했던 방송촬영 뒷 이야기를 하시던 모습이 11월 1일 방송이 되어 보았는데
급작스럽게 운명 소식을 접 하니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란 말이 생각난다.
엄앵란 여사님은 장례식장에 많은 조문객들이 오니 인생을 잘 사신분
이라고 말하시기도 했는데 실제로 장례식장을 가서 보니 유명 인사들이
줄지어 조문을 하는 조문객들 모습을 잠시 지켜보면서 장례식장 분위기를
보고나니 고인이 사신 동안 멋진 인생을 사셨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부디 저 세상에 가셔서 사시는 동안 못다 하신 모든 것들을 소원 이루시고
천국에서 유가족과 후배들에게 복도 많이 내려 주시기를 기원하고 싶다.
▲ 고인 생전에 주고 받은 문자 이야기를 해 드렸다.
▲ 장례식장 입구에는 언론사 취재팀들로 복잡했다.
▲ 넓은 장례식장에는 조화가 무척 많이 보였다.
▲ 한태일(韓兌一) 배우님 모습도 보였다.
배우 데뷔 초기에 태일(太一)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했었는데 그동안
필자와는 만날 기회가 먗번 있었는데 빌적마다 70대 종반 년세가 무색하리만큼
활력이 넘치시는 원로 배우라 아직도 방송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 원로배우 강신성일 전 의원님과 박종명(右)
몇년 전 세종문화회관 운정 김종필 전 총리님 출판기념 행사에 참석을 하셨기에
반갑게 만나뵙고 기념촬영도 하면서 내가 영천에 찾아 가 신성일님 인터뷰 한번
하고 싶다고 하니 연락 후 한번 내려 오라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일을 잊지 않고
오는 5월 8일 팔순기념 행사에 나를 초대해 주셨는데 너무나 안타까웠었다.
▲ 경북 영천에 있는 성일가 모습(방송화면에서)
오늘 장례식이 모두 끝나 유골이 되어 자신이 사시던 성일가로 다시 가신
강신성일 고인의 안식처인 성일가 정원에 마련되었다는 뉴스를 듣고는
생전에 그렇게 본인이 결정하신대로 해드린 유가족에게 고마워 하고싶다.
앞으로 영천 성일가는 많은 영화팬들이 방문해 그분의 흔적들을 보면서
유명 관광지로 변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즐겨찾는 명소로 변할 거 같다.
지난 일이지만 생전에 팔순 기념잔치도 성일가에서 하신다고 문자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필자의 칠순일과 겹쳐 해외 베트남 다낭으로 우리 가족들이
여행 준비가 되어 해외여행을 취소하는 일이 쉽지않아 성일가에 못내려 갔었다
강신성일(배우 신성일) 전의원에게서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받았던 내용인즉
오는 5월 8일이 강신성일 배우께서 팔순이 되어 영천에 있는 성일가에서 200
여명을 초대해 팔순기념 모임이 있으니 나도 시간되면 참석하라는 문자였다
그 당시 팔순연 행사에 참석하면 원로배우님들도 많이 만나 사진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내가 국내여행도 아니고 온 가족이 가는 해외 여행이라
취소도 못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잊지 않으려고 전화기 문자를 보관하고 있다 .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만날 기회를 달라고 문자를 보내드렸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쉬운 일이라 잊지못해 그 당시 문자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었다.
또한 방송에 출연하시면 녹화후에 언제 방송이 되니 보라고 연락주시던
멧세지들도 고인이 되시니 너무나 중요한 흔적이 되기에 공개해 봅니다.
▲ MBC 방송 화면에서 부부모습
▲ MBC 방송 화면에서 부부모습
80세가 되시던 해 MBC에 방송된 신성일, 엄앵란 부부의 감동어린 모습을
보면서 배우 엄앵란 여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은 분인데 이날 조문을 하면서
만나 뵈니 너무나 다정다감하셔서 감사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엄앵란 여사가 유방암으로 큰 수술을 하셨었는데 당시에 병간호를 하시면서
신성일, 엄앵란 부부가 다시 만남을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되게 해 준 방송이었다.
생전에 방송을 통해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도 하시고 엄앵란 여사께서는 대한민국
유명배우인 신성일 남편이 초라하게 병원신세를 지는게 싦어 여유도 없으면서
남편 뒷바라지를 최고로 하시던 일화를 뉴스에서 보고 떨어져 사신 기간이 길지만
부부의 깊은 사랑은 계속 이어져 온 순애보적인 부부사랑을 하신분들 같다.
이날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만나기 힘든 배우들 모습이 많이 보였기에
상가집 예의상 벗어 난 일인 줄 알지만 내가 이 글을 쓰기위해 장미희, 태현실,
이덕화등 유명한 몇분들과 사진을 담아 공개해 봅니다.
▲ 인기스타 장미희 배우와 박종명 필자
내가 젊은시절 어떤 행사장에서 본후 이날 두번째로 직접 보았는데 아직도
그의 미모는 대단했는데 상가집이라 꾸밈이 적어서 순수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실제로 가까이 보니 얼굴이 선한 모습이 아직도 많은 팬들에게
인기가 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장미희 배우는 아직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유명한 정진우(모자 쓴 남자분) 영화감독 모습도 보인다
장미희, 태현실, 오경아, 배우들이 영화감독들과 자리를 함께 한 모습이
좋아 보이기에 부탁해 단체사진을 담아 보았다.
▲ 인기스타 태현실 배우와 박종명 필자
내가 총각시절에 영등포 모 극장 쑈에 태현실 배우가 나온다고 하기에
구경을 갔었는데 무대위 조명속에 보인 태현실 배우의 미모는 아름다워
지금까지도 그때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정도다.
지난 2009년 5월 한국에술인총연합회에서 매년 시상하는 스승님추대식
행사에서 스승님으로 추대 수상을 하게되어 그날 행사 취재를 갔다가 직접
만나 보았을때도 아름다움을 유지히고 있었다.
올해 년세가 70대 후반 나이가 되고보니 곱게 늙으신 모습이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어도 아직도 나이에 비해 아름다움을 유지하시고 있다.
▲ 인기배우 오경아(右) 장미희 배우 포즈를 부탁해 담아 본 사진
오경아 배우님은 나와 만남이 몇차례 되어서 그런지 필자를 반갑게
맞아 주어서 기분이 좋아 일부러 두분에게 부탁해 담은 기념사진이다.
오경아 배우의 인기도 내가 젊은 시절 그의 팬이기도 할 정도로 유명한
배우였는데 70대가 넘은 나이인데도 옛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지상학 회장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는 이번 장례는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안성기 배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고 강수연, 거룡,
송강호, 이덕화, 장미희, 최민식, 배우들이 부위원장을 맡았다.
▲ 유명한 이덕화 스타와 박종명(左) 필자
그동안 내가 꼭 한번 만나서 기념사진을 담아 보고 싶은 유명인 중 한사람
이기에 나에게는 이날 만남이 너무나 반가워서 함께 담아 본 기념사진이다.
장례위원회 부위원장 책임을 맡아 장례식장을 찾은 많은 분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발이 넓은 마당발 소문대로 정치인들과도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기에
내가 일부러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싶어 부탁해 담은 사진들을 공개해 본다
▲ (사)한국영화베우협회 김국현 이사장 이덕화 배우 김영인 배우
강신성일 배우 영화인장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장 책임을 맡은 김국현
(사)한국영화베우협회 이사장은 장례식장에서 제일 바쁜 모습이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책임을 맡은 이덕화 부위원장도 내빈들과 악수를 하면서
조문객들을 맞이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원로배우 김영인 장례위원 모습도 보이기에 담은 기념사진이다.
▲ 장례위원회 이덕화 부위원장과 유승민 국회의원
▲ 유명한 한지일 영화 제작자와 유승민 국회의원
영화제작자 한지일 유명배우도 장례식장에서 조문객들 접대를 하고 있었다.
▲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인 이덕화 배우와 정병국 국회의원
▲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인 이덕화 배우와 지상욱 국회의원
▲ 원로배우 정혜선 원로 성우 고은정(右)
필자가 집에 올려고 3층 장례식장을 나오는데 일층에서 두분이
다정하게 장례식장에 오시기에 나와 기념사진을 담은 추억이 있는
두분이라 반가워 인사를 하고는 포즈를 부탁해 담아 본 사진이다.
▲ 뽀빠이 이상룡 진행자와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김성태 국회의원
▲ 뽀빠이 이상룡 진행자와 자유한국당 나경원 국회의원
▲ 영화배우 김진양(左) 진봉진 연기자들 모습도 보였다.
김진양 배우는 조연배우로 열심히 활동하는 배우로서 좋은사람들
모임이란 배우들 봉사겸 친목단체서 만나보았는데 활동이 대단해 동료 배우
들에게 베푸는 스터일이라 연기자들로부터 인기가 대단한 배우다.
왕년에 유명했던 진봉진 배우도 몇차례 만남이 잇었는데 나를 볼적마다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원로배우이시다.
▲ 원로배우 전원주님 모습도 보였다.
▲ 유명한 시인 박동규 교수
시인으로도 유명하신 박동규 교수께서 이날 장례식장에 모습이 보이기에
부탁드려 담은 기념사진인데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나오시는 박목월 시인의
아들이기에 더 유명한 분이시다.
몇년전 친구아들 결혼식 주례를 하시던 모습을 뵌적이 있었는데 나로서는
꼭 한번 만나 보고싶은 분들 중 한분이라 이날 만남이 나로선 반가웠다.
▲ 맛있게 먹었던 장례식장 식단 모습
▲ 인터뷰 하시는 모습(세종문화회관 행사장에서)
▼ 아래 내용은 SBS 뉴스 공개 자료에서 참조했다
"난 '딴따라'가 아닙니다. 종합예술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입니다.
지난 11월 4일 새벽 향년 81세로 타계한 신성일은 한국 영화 역사와
발자취를 함께한 '영원한 스타'였습니다.
빼어 난 외모와 지적이고 반항적이면서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이미지
는 1950~60년대 기존 배우들과 차별화하며 그를 당대 최고 청춘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1937년 대구에서 태어 난 신성일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운동 등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56년 경북고를 졸업한 그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자 무작정 상경
해 서울대 상대에 지원했으나 낙방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에 들어 온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고, 3천여
대 1의 오디션 경쟁률을 뚫고 당시 신상옥 감독이 세운 신필름 전속
연기자가 됐습니다.
신 감독 영화 '로맨스 빠빠'(1960년)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신필름을 나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에 출연
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은 김기덕 감독 '맨발의 청춘'(1964).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반항적인 이미지로 당대 최고 스타로 떠 올랐습니다.
청춘영화 대명사가 된 이 작품은 당시 서울에서만 약 36만 명을
동원할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한 청춘 영화가 쏟아졌습니다.
필자의 기억엔 총각때 신성일 엄앵란 주인공 영화제목 피리불던 모녀고개
이 영화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엄앵란 배우에게 신참배우 신성일이
상대역 주인공이 되어 열연을 한 후에 결혼을 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엄앵란 배우의 미모는 그 당시 많은 영화팬들에게 최고로 인기를 누리던
스타였는데 당시에 신성일 배우는 잘 생긴 남자배우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영화 개봉후에 신성일 배우의 인기가 올라가 결혼발표가 있을
당시는 두사람 모두가 한국 최고의 남자, 여자 배우로 많은 팬들에게
하늘을 찌를정도의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남, 녀 배우들이었다.
신성일은 인기 최고 절정기인 그해 11월 워커힐호텔에서 엄앵란과
결혼했습니다. 하객과 팬 4천 명의 인파가 몰린 두 사람의 '세기의
결혼식'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습니다.
신성일은 나중에 외도와 사업실패 등으로 40년 넘게 별거 상태로
지냈지만, 힘든 시기에는 서로 곁을 지키며 기둥이 돼줬습니다.
신성일의 전성기는 결혼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위험한 청춘'(1966), '불타는 청춘'(1966)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남자 배우로서는 독보적이었기에, 당시 거의 모든 여배우가 신성일
의 상대역을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0∼60년대 신성일 인기는 미국의 제임스 딘, 프랑스의 알랭
들롱과 비견될 정도였습니다.
부산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지난해 '신성일 회고전'을 맞아
펴낸 책 '배우의 신화, 영원한 스타'에 따르면 1967년 한해에만
신성일이 주연한 영화 51편이 극장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한국영화 개봉작 1천194편 중
324편에 그가 등장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책에서 "이토록 한 사람에게 영화산업과 예술이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없었다.
신성일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영화사는 물론 한국 현대 문화사
자체를 파악할 수 없다"고 평했습니다.
신성일은 무력과 좌절에 빠진 지식인을 연기한 '별들의 고향'(1974)
을 비롯해 '겨울여자'(1977), '장남'(1984), '길소뜸'(1985) 등 70~80년
대에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2005년에는 '태풍'에 특별 출연했고, 2013년에는 '망각 속의 정사'(1993)
이후 20년 만에 영화 '야관문: 욕망의 꽃' 주연을 맡으며 연기 열정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총 500편이 넘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습니다.
그가 배우 외길을 걸은 것은 아닙니다. 정치에도 눈을 돌린 신성일은 11대(1981),
15대(1996) 총선에서 거푸 낙선한 끝에 2000년 16대 총선 때 대구 동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2003년에는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와 관련해 광고업자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영화계에서도 연기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1971년엔 '연애교실'로 감독에 입
문했고, 1989년에는 성일시네마트를 설립해 제작자로도 활동했습니다.
70대에도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며 건강에 신경 쓴 그는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그는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떨쳐내겠다. 이겨낼 자신이 있다"며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학창시절 육상과 평행봉, 유도 등 다양한 운동을 한 그는 병마에 쉽게 무너
지지 않았습니다.지난해 부산영화제 회고전을 비롯해 올해 10월 열린 부산
영화제에도 참석해 레드카펫을 밟으며 손 하트를 날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서 취재진과 만나 "나는 '딴따라' 소리가 제일
싫다. 딴따라 소리 들으려고 영화계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종합예술 속의 한가운데 있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당시 투병 이후 '인생 2막'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밝혔었습니다.
그는 "막장드라마 대신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영화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 중이며, 김홍신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도 영화로 옮길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경북 영천에 한옥을 지어 살던 고인은 그곳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소규모
음악회를 여는 등 사람들의 쉼터로 만들겠다는 구상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나 고인은 한 마지막 바람들을 끝내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과
이별했습니다. (SBS 뉴스 공개 자료에서 참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