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예가 해주 엄기환 작가와 박종명
지난 9월 13일 이천 설봉산아래 설봉공원에서 충청향우회중앙회 산악회
등반 행사에 참석해 점심을 먹던 중 조금은 다른 옷차림이 보이기에 누구냐고
물어 보았더니 이천도자기 축제장에 작품을 출품한 유명한 청자 도예가라고 한다.
▲ 엄기환 작가가 운영하고 있는 체험장에서
요즘 이천 도자기 축제가 열리고 있기에 구경좀 해 보려고 도지기 축제장으로
동행했는데 행사장안에 자신이 직접 도자순례교실을 운영하면서 관람객에게
도자기를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장을 구경 시켜주기도 하면서 소개해 주었다.
▲ 해주 엄기환 도예가 수염과 머리가 예술가처럼 보인다
▲ 도자 순례교실 체험장 안내문이다
▲ 관람객들이 직접 만든 작품들(불가마에 넣기전 모습)
▲ 실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과 가족들 모습
▲보기에도 아름다운 엄기환 도예가의 작품들
나로서는 처음만난 잘 모르는 작가이기에 자신이 출품한 작품도 보여 달라고
부탁을 하니 전시장으로 올라가 전문작가 작품 전시장 안에 들어가서 자신이
만든 작품 도자가 2점을 구경 시켜주면서 작품 소개도 해 주었다.
▲ 전문작가 전시장안에 전시 된 작품들이다
▲ 엄기환 도예가의 작품뒤에서 기념촬영
이런 작가의 작품은 돈을 받고 판매를 한다면 얼마나 주어야 하느냐고 질문
하니 작품 1개당 500만원의 가치가 나간다고 하는 멋진 작품이었다.
▲ 설봉공원 공연장 지붕모습
▲ 설봉공원안에 있는 조각품이 예쁘다
▲ 재미있게 생긴 조각품들
▲ 멋진 작품이다
▲ 가마터를 모방해 만든 전시장 가는 길 통로다
▲ 구경하러 온 꼬마들과 동심으로 돌아간 작가
▲ 전시장 가는길 통로 내부 모습이다
▲소나무에 가린 한옥이 전통찻집이다.
▲주전자에 끓는 물을 부어 잠시 후 우러난 녹차를 마시게 한다.
엄기환 작가는 나에게 전통차를 대접한다고 행사장안에 있는 전통차를
시음하는 찻집으로 안내해 몇잔을 마시면서 음미하게 만들었는데 더위에
갈증해소가 되어 너무 맛도 좋고 작가 덕분에 차에대한 공부를 하고왔다.
▲ 녹차를 기다리는 엄기환 도예가모습
▲ 다도를 배우고 시음하는 전통찻집 건물이다
▲ 도자기 축제가 열리고 있는 설봉공원에는 조각춤들이 많이 보였다
짐에서 이 글을 쓰기위해 인터넷 자료 검색을 해 보니 마침 그 작가에 관련
정보가 있기에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퍼왔다.
아래글 내용은 엄기환 작가 인터넷 검색 자료참조 (펌)
어깨 아래로 내려오는 희끗희끗한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해주 엄기환 선생의 모습이 꼭 구름을 유유히 몰고 다니는
도사 같다. 어느새 황혼의 나이로 접어든 해주 선생이 도자 예술에 입문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어린 시절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직후 1959년, 모두가 힘들고 배고팠던 시절이었다.선생은 당시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당연히 가정 형편상 그러질 못하고 돈벌이를 위해
요장에 취직하였다.
요즘처럼 적성에 맞고 재주가 있어 뭔가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시작한 길이
아니었다. 배고픔을 조금이라도 잊고 기울어진 가세를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에 흙을 묻히며 배워야 했던 기술이었다.
하지만 선조대대로 500년 동안 경기도 이천에서 뿌리를 내려왔다는 선생의
집안은 어쩌면 그가 한평생 도자기 장인으로 살아갈 운명을 일찌감치 미리
정해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아무것도 몰랐던 14살 소년은 고향 이천에서 수금도요에 입문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도자기 인생을 시작하게 되고, 1972년 당시 고려청자 연구
의 대가인 해강 유근형 선생을 만나게 된다.
그 후 해주 선생은 스승인 해강 선생의 지고한 연구정신을 전신으로 받아
들이며 온 심신의 혼을 청자 전통 재현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1985년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내건 ‘해주도예 연구소’를 설립했다.
하지만 독립 후 자신의 작업실을 열었다고 해서 탄탄대로의 작업 길을 걸어
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의 시대는 지금의 여건과는 천양지차였다.
도예가들의 수는 턱없이 적었고, 도자 공부의 지침이 될 마땅한 참고 책자
하나 구하기 힘들었고, 지금처럼 마음껏 묻고 상의하고 실험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찾아 눈물겨운 세월을 연구와
실험으로 버티며 오랜 시간동안 묵묵히 청자 장인으로써 한 길을 걸어왔다.
12세기에 탄생된 고려청자는 최고의 가치와 경지가 담긴 예술 작품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실용적인 것이 바로 청자입니다.”
청자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해주 선생이 망설임 없이 대답한 말이다.
청자는 시대적으로 우리보다 중국이 먼저 앞서 개발해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청자보다 우리의 고려청자가 훨씬 맑고
깨끗한 느낌을 자아내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고려 비색’이라고 칭할 정도로 고려청자의 그 청색이 신비로울 정도로
뛰어나 중국을 능가했을 정도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주로 둔탁한 유약을
쓰는데 반해 우리의 유약이 훨씬 더 맑다는 것이 작가의 설명이다.
어떤 청자는 맑고 고매한 기운을 뿜어내는 약한 연두색이 은은히 감도는
반면 또 다른 청자는 기품있고 화려한 진한 녹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의미에 맞게끔 다양한 청색의 아름다움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것은 어느정도 숙련된 도공만이 가능했던 것인데 우리 선조들은 바로 그
비법을 알았던 숙련된 도공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기술을 가져와 독자적인 방식으로 우리만의 전통을 만들어
그 맥을 이어온 선조의 정신을 계승하고 받들기 위해,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의 문화유산인 청자의 가치를 후대에 계속 잇기 위해
선생은 오랜 세월을 청자 작업에 헌신하고 열중했다.
청자하면 누구나 익히 아는 상감기법은 청자 겉면을 얇게 판 다음, 학이나 꽃,
나무, 새 등의 모습에 맞게 백토나 자토를 집어넣는 기법으로 손이 많이 가는
고된 작업이다.
일반 도자기 제작 과정보다 보통 7배 더 힘들다고 하는 이 과정 끝에 비로소
하나의 영롱한 세계를 품은 아름다운 청자가 비로소 완성된다.
아무것도 몰랐던 소년시절부터 환갑을 훌쩍 넘긴 지금 이 순간까지, 혹독한
진통끝에 탄생되는 청자의 잔인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해주 선생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긴 세월동안 오로지 흙을 만지고
가마곁을 꾸준히 지켜온 것이다.
양각, 투각 등 다양한 기법을 시도해 독특한 미를 드러내고 있는 청자나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수놓아져 고전적인 미를 물씬 풍기게 하는 청자등
해주 선생의 모든 작품들이 다 훌륭했지만 그중에서도 아홉 마리의 용이 입을
벌린 채 병을 둘러싸고 있는 청자 양각구룡정병이 애착이 가는 작품이란다.
고개를 쳐들고 힘찬 기운으로 하늘을 승천하고자 하는 모습이 특이하면서도
세련된 청자의 느낌으로 재현되어 제작의 난이도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비색청자의 재현에 몰두하고 연구의 끈을 놓지 않고 여러 방법들을
시도한 선생의 타고난 근면함과 열정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선조들의 예술혼을 이어받겠다는 정신이 이처럼 반세기를 청자 제작에
힘쓰며 전통도자기 연구에 힘쓰고 있는 선생에게 작가로써 보다 강한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프랑스,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태국 등 세계 각국의
나라에 전시회를 가지며 우리의 전통을 알리는 데 일조해오던 선생은 1998년,
일본 가고시마와 수교 400주년을 맞이해 ‘한일 도자기 교류전’ 참여를
위해 일본을 가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 제작 기술을 착취당한 우리의 선조들의
혼과 넋을 위로하기 위해 400여 년 전 남원에서 끌려간 심당길의 14대 후손
심수관 씨의 요청으로 도자기 해사가 열리게 되었고 이에 해주 선생도 함께
참여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도공들이 일본에 끌려갔을 때 사람도 흙도 유약도 다 조선
에서 가지고 왔지만 불씨만큼은 가지고 오지 못했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흙도 유약도 사람도 다 조선에서 가지고 왔지만 그것을
굽는 불씨만은 가지고 오질 못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그 불씨를 다시 되찾아 가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일본으로 건너
갔습니다.”
그래서 선생은 가고시마에 갈 때 당시 우리 선조들이 일본으로 끌려갔을 때
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한복을 입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국의 불로 도자기를
굽지 못해 늘 아쉬워하며 망향의 한을 품었던 우리 선조들이 일본에서 사용
했던 불씨를 다시 우리 조국의 품으로 되찾아오겠다는 강인한 의지와 서러운
타향살이 속에서도 끝내 멈출 줄 몰랐던 선조들의 예술혼을 이어받겠다는
정신을 온 몸으로 표출한 것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가고시마에는 4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작업한 흔적들과 도자기
공부를 했던 자료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해주 선생은 그 진귀한 흔적의 모습들을 고스란히 두 눈에 담았고 동시에
한국인 도공으로써 절대 굽히지 않을 자부심까지 함께 가슴 속에 깊이
아로새겼다.
가슴 속에 뜨거운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그 때 기르기
시작한 머리와 수염을 지금까지 10년을 훌쩍 넘긴 긴 시간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해주 선생이 긴 머리카락과 수염을 지금까지도 계속 고집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인생의 반세기를 흙 하나만을 바라보며 이처럼 한국의 도자 작가로써 해주
선생이 가진 높은 자부심은 그동안 선생이 소장해 온 도자기 1500점에서도
여실히 묻어났다.
막 도자기를 배우기 시작했던 초창기 50년대부터 시작해 오늘날까지 이천,
여주, 광주에서 선생이 모은 도자기들이다.
이토록 엄청난 양의 도자기를 수집하고 소장한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현재
도자기를 공부하고 만드는 젊은 작가들에게 직접 눈으로 우리의 도자기를
보여주며 우리 전통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도자 제작에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만큼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과 열정 하나로 한
평생 청자 장인의 길을 가진 선생이기에 그는 앞으로 도자 작가로써 긴 인생
을 시작할 젊은이들에게도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을 전했다.
시대가 자꾸 빠르게 변하고 상업적인 것들을 많이 추구하지만 문화와 예술은
결코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힘들어도 인내하며 길게 내다보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내면의
세계를 성숙시켜 나가야 하구요.
그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작가 정신이 있었기에 천년의 문화와 역사
인 도자기가 우리 곁에 숨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기술과 예술혼으로 아름다운 청자를 만들어낸 우리 선조들의 땅
에서 태어나 한 평생 청자를 만들며 작가로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에 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다는 해주 엄기환 선생이다.
그래서 그의 손끝에서 탄생된 청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자랑한다는 그리스의 어느 해안의 색보다도 훨씬 더 깊고 깨끗한 자태를
드러내고, 드높은 가을 하늘보다 더 진하고 맑은 기운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과 강풍에도 쉽사리 꺾이지 않고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곧게 뻗어가는 푸른 대나무처럼 해주 엄기환 선생은 인생의 반세기를 흙
하나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곧게 살아왔다.
이제는 아들 엄준호 씨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자기 작가의 길을 걸어
가고 있으니 앞으로 두 부자가 함께 만들어갈 예술의 길은 아마 틀림없이
우리 선조 도공의 恨을 위로해 줄 것이리라. (인터넷 공개자료 옮김)
▲ 청자 도예가 해주 엄기환 작가와 박종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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