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이화여대수련원 금란서원에 건립되었다. |
| 동상 제막식에는 김선욱 이화여대 총장,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 등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릴 예정이며 건립은 김 전 총장의 동생인 김동길 명예교수가 추진했다.
김 전 총장은 평남 맹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슬리언대와 템플대 대학원을 수학한 뒤 1961~1979년 세 차례 이화여대 총장을 지냈다.
24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으며 학원자율화와 교복자율화를 추진했고 1979년 초 연풍면 고사리로 이주해 별세할 때까지 거처하며 이화여대수련원과 고사리교회를 설립했다.
김 전 총장은 1976년 동양인 최초로 미국 유니언신학대학에서 수여하는 유니언메달을 받았고 1982년 인촌문화상을 받았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 김동길 교수님
▼ 김동길 교수님 누님에 대한 추억의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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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길
오늘은 돌아가신 나의 누님 김옥길 여사의 90회 생신날입니다.
음력으로는 1921년 3월 1일 만세력을 찾아보니 그 날이 양력으로는
4월 17일이어서 돌아가신 뒤에 내가 바꾸었습니다.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점심에 150명 쯤 되는 많은 손님들을
우리 집 마당에 초청하여 냉면을 대접하는 일을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오늘은 주일이라 교회에 가야하는 이들이 많아서
하루를 앞당겨 어제 축하하는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번 누님의 생일 축하 모임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11번지,
고사리 마을에서 가졌습니다. 그는 정년 전에 이화대학을 은퇴하였고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이곳에서 외롭게 고생하며 사셨습니다.
처음에는 전기도 없고 전화도 없고,
산에 가서 솔방울을 주어다 불을 때기도 하였습니다.
우물을 파서 물을 깃고 손수 밥을 지어
동생인 나와 저녁을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10.26 사태 뒤 연세 대학에 잠시 복직했지만
신군부가 등장하는 바람에 다시 밀려나 고사리 마을에서 누님을 모시고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누님은 한평생을 이화에 바치시는 가운데
18년 동안 총장 일을 보셨습니다.
“나도 장기 집권이다.”라고 농담을 하시면서,
그래서 장기 집권하는 군사정권을 나무랄 수도 없다면서
좌중을 웃기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 더 총장직에 선임될 수 있는 나이였지만
굳이 정년 전에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하도 오래 총장으로 있으니까 어느 교수가 찾아와 무슨 새로운 제안을 해도
내가 다 아는 이야기니 이래서야 학교가 발전을 하겠나,
내가 물러나야지. 물러난 뒤에는 나는 서울에 살지 않고
멀리 떠나 시골에 가서 살겠다.
내가 학교 가까이 있으면 새로 총장 된 사람이 총장 노릇 하기 어려워!
새 총장 보다는 18년 총장 지낸 나를 찾아오게 될 것이니.”
그러시면서, 여러 곳을 다니셨습니다.
마침내 고사리 마을을 찾았습니다.
“여기가 좋다. 우리가 태어난 고향 땅 같구나.”
문경새재까지 걸어서 20분, 30분 거리에 있는 마을,
뒤에는 신선봉이 높이 솟아 있어 험한 조령 기슭 야산에,
내가 <대통령의 웃음>,<하늘을 우러러>, <링컨의 일생> 등을 써서
받은 인세를 모아 땅이 7천 평,
금란정과 행랑채를 아름답게 짓는 일에
정성을 다한 김경환 선생을 잊을 수 없습니다.
60회 생신을 맞아,그 땅과 집을 모두 이화학당에 기증하고 싶다
하시기에 나는 무조건 “그러세요.” 하였습니다.
그날부터, 그 땅과 집의 소유권은 이화학당에 있습니다.
동생인 내가 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버스 타고 와서 ‘작은 새재’에서 내려,
걸어오는 날에는 툇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리시던
그 모습을 내가 오늘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둘이 함께 바라보던 형언키 어려운 석양의 아름다움.
모시고 조령 삼관 문까지 걸어서 올라가 바위에 걸터앉아
사탕 한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주시던
누님 얼굴의 그 미소를 나는 죽는 날까지 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인생은 괴로우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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