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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명이 고 육영수 여사 생가지 복원 현장을 다녀 와서

종명이 2012. 12. 7. 14:31

 

▲ 육영수 영부인 탄신기념 숭모제 행사장에서

 

▲고 육영수 영부인 생가가 복원 된 생가 일부 모습

 

 

지난 11월29일 고 육영수 영부인 제 87주년 탄신기념 숭모제에 참석하려고 옥천 행사

장으로  내려 가던 길에 서울서 출발한 일행들과 함께 육영수 영부인 생가지를 들렸다.

 

나는 1970년대 근무하던 직장에서 비보를 들었던 당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되던 중에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인
문세광이 쏜 총탄에 무대위에서 행사를 지켜 보시던 육영수 여사가 저격되어 운명하셨다.

 

그날이 1호선 지하철이 개통되는 날이기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개통되는 지하철시대
개막을 축하해야 되는 날이기도 하였는데 국민들에게는 너무나 서글픈 날이 되었었다.

 

나로서는 생전에 박대통령 내외분을 한번 뵌적이 있어 나로서는 육영수 영부인 모습을 회상

하면 사진으로 보아오던 육영수 여사님 실제 모습은 우아하시고 피부도 희고 박정희

대통령이 추모의 글에 표현하신 목련꽃처럼 곱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금도 기억된다.

 

우리나라 많은 국민들이 영부인의 급작스런 서거로 고인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은

청와대를 떠난 장레 운구행렬이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까지 가는 동안 거리에 나온 많은

국민들의 애통해 하던 구경나온 국민들의 울음 소리가 지금도 들려온다.

 

나는 그당시 지금의 삼각지 로타리 근처에서 고 육영수 영부인 운구 행렬을 도로변에서
두시간정도  기다렸다가 지나가는 운구차 행렬 모습을 지켜 보았는데 지금도 기억된다.

 

지난 1973년도 일인데 세월이 흘러 현재까지 생존해 계신다면 87세가 되시기에 올해

육영수 여사님 탄신기념 숭모제가 87주년이 된다고 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번째 육영수 여사님 생가지에 들려보니 1950년대 당시를 살아 온

나로서는 지금의 생가 복원 모습이 너무 아쉬움을 가져다 준 복원현장 같았다.

 

그 당시의 우리나라 기와집들 모습도 아닌 거 같았고 육영수 여사님의 생전에 사시던

집인데도 살림살이가 어려울때 우리나라 국민들이 살던 현장 모습이 하나도 안보인다.

 

가이드 이야기로는 생가가 오래도록 방치되어 짐이 폐가가 되어 있어 생가터만 남아 있는

상태라 기존의 건물들을 모두 헐어내고 새로 복원해 놓은 현재 모습이라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그 많은 건물 가운데 한군데라도 육영수 여사님 살던 시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허름한 페허가라도 그 당시의 냄새가 나는 건물이 보고 싶었는데 너무나 원형을 무시

하고 새로운 정승집이 되어 있어 생가지 풍경안에 고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를 사모

하는 사진과 글들이 그곳이 생가지인 걸 알려주는 거 같아 너무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옛날 골동품이 잘 생기지 않았어도 오래된 물건이기에 그 가격이 천정부지로 비싼데
그런 모습들이 한군데도 없는 생가지에는 육영수 여사의 흔적들이 생전에 사용하시던 유물
몇점 이불이나 부엌 가구등이 보이지만 제일 중요한 생가터안에 헌집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제라도 육영수 여사의 생전에 유물들이 발견되면 그런 유품들을 생가지에 전시해서라도
어렵게 관심을 가지고 방문하는  생가지에 육영수여사님 냄새가 풍기는 생가지로 복원해서
민속촌 처럼 꾸며진 생가가 아니라 그안에 들어가면 육영수 여사님 그 당시의 생활을 느낄
수 있는 공간 확보가 필요하기에 지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그안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지적들을 겸허이 받아
들여 생가 관리를 하는 담당자들의 생각 전환이 늦었지만 앞으로 복원해 주기 바란다.

 

자료에 의하면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925년 11월 29일에 태어난
장소라고 설명하면서 현재 건물은 없지만 1600년대 김정승 이후 송정승 및 민정승이 거주
하여 삼정승의 집이라 불리던 가옥을 육영수 여사의 부친인 육종관씨가 민정승의 자손이던
민대감에게서 1920년에 매입하였다고 한다.

 

6,047㎡의 대지 위에 1970년 초에 개축된 관리사·사당 등만 남아 있으며, 주변은 울창
한 산림이 형성되어 있고 본채·사랑채·별당 등 10여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터만 남아 있으며 주변은 연못과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건물의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넓직한 사랑채 터가 있고 그 뒤에 안채 터가 있으며,
청기와 지붕의 사당과 별당 터가 있다고 생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지금의 복원된 건물
들은 청기와도 아니고 잘 꾸며진 한옥마을에 들어 가 구경하는 기분이 든다.

 

복원하는데 제일 중요한 육영수 여사님의 젊은시절 사시선 집터 냄새가 풍기는 모습들이
한군데도 안보여서 지적하는 그 당시를 함께한 사람으로서 지적하고 싶어 말해 보았다.

 

내가 존경하는 육영수 여사님의 추억들이 생가지를 방문하면 많이 볼 수 있겠지 생각 기대
하고 내려가 보고 조금은 아쉬운점들이 발견되어 나와같은 생각을 하는 구경꾼들이 그날도
많이 불만을 말하기에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작년과 다른 모습은 생가지 주변에 집들이 깨끗한 별장처럼 주변 정리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들이 사진을 찍어 보니 생가지 주변 모습이 아름다워져서 잘한 일 같았다

 

옥천군에 생가지 관리를 하는 담당자들은 이런점을 생각해서 앞으로 관심을 갖고 

육영수 여사님의 유품들을 찾아 더욱 많이  전시를 해서라도 그분의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고 육영수 여사님의 모습들이 그리워지는 생가지로 변화해 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 안채앞에서 일행들과 단페사진

 

 

▲ 냉장고 역할을 하던 석빙고 모습이 이색적이다

 

 

 

 

 

 

 

 

 

 

 

 

 

 

 

 

 

 

 

 

 

▲ 일행중에 원로들 모습이다

 

▲ 옥천 식당에서 점심식사중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기념사진

 

▲ 육영수 여사님 숭모제에 참석한 일행들 단체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