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청향우회중앙회 유한열 총재님과 박종명 필자
지난 4월 28일 오전 11시 과거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던 玉溪 故 유진산
선생 43주년 추도식이 충남 공주시 금산군 향리에 있는 묘역에서 열렸다.
서울 충청향우회중앙회 사무실이 있는 장교빌딩앞에서 출발한 버스에
동승해 내려 가 현지 참석자들과 함께 산소가 있는 동네 뒷산으로 올라갔다.
추도식 행사가 시작되니 정관계 등 각계 인사 50 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유진산 총재님 막내 아들인 유한열 前 국회의원의 내빈소개와 오세응
전 국회의장의 추도사에 이어 참석인사들의 헌화분향 순으로 진행됐다.
이날 행사에서 오세웅 전 국회의장의 추념사는 생전에 함께 하신 유진산
전 총재님의 생전의 있었던 이야기를 회고했다.
1971년 신민당 총재시 대통령으로 출마하시려던 계획이 있었지만 당시
40대였던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들이 출마를 원하자 야당분열을
원치 않으셔서 40대 젊은 후배들에게 대통령 출마를 양보했다 면서
요즘 상황에서 이는 아무나 할 수 없는 휼륭한 결단이었다고 밝혔다.
이날 행사장에는 이번 대통령선거 12번 후보로 등록한 이경희 후보
모습도 보였는데 유진산 총재님 막내아들(4남)인 유한열 전 의원은 이날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뜻을 표시하며 선친의 유지를 전했다.
▲ 선영 요지 입구에 마련 된 비석과 비문모습
▽ 인터넷 백과사전 참조 내용을 옮겨왔다
유진산 전 총재님 본관은 문화(文化). 본명은 영필(永弼), 필명은 진산(珍山).
호는 옥계(玉溪). 충청남도 금산 출신. 경덕(敬德)의 외아들로 어머니는
김경하(金敬夏)이고, 부인은 김현신(金賢信)이다.
와세대대학 재학당시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되었고, 광복 후 청년운동
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 1954년 이래 3·4·5·6·7·8·9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야당 중진 의원으로 활약했다.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2학년 때 교내
항일벽보사건으로 자퇴하고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923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제1고등학원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정경학부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독서회사건(讀書會事件)으로
이치타니형무소(市谷刑務所)에 투옥되었다.
1932년에 귀국하여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만들어 농민운동을 펴다가
일본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34년일본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5년에서 광복까지 『농민독본 農民讀本』의 편집을 하면서 필명을
진산(眞山:나중에 珍山으로 고침.)이라 하고, 전진한(錢鎭漢)·김산(金山)
등과 농민운동을 폈으며, 이 무렵부터 조병옥(趙炳玉)·백관수(白寬洙)·
장택상(張澤相) 등과 교유하였다.
광복을 맞아 우익청년단체 흥국사(興國社)를 조직하여 좌익의 최대단체
였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朝鮮建國促進靑年同盟, 建靑)을 해체시키고,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주동세력이 중심이 된 인민대표자대회를 유회
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며, 김일성(金日成)·강양욱(康良煜) 등을 제거
하기 위하여 청년단원들을 평양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혁신청년회를 결성하여 임시정부요인과 건국 추진에 노력
하였으며, 1946년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을 창설하여 반탁운동에 앞장섰다.
1947년 7월에는 대한민주청년총동맹의 후신으로 청년조선총동맹
(靑年朝鮮總同盟)의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다.
미군정하에서 두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제헌의원 총선에서는 낙선되었으나
이승만정권의 독재화에 항쟁하여 1952년부산 국제구락부에서 조병옥등과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다가 계엄군에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54년 무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 그 해 4사5입개헌때에는
신익희(申翼熙)·조병옥 등과 호헌동지회를 발족시켰다.
1955년 신당발기추진8인위원회 위원, 1956년 민주당대통령후보 신익희
선거참모를 거쳐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민주당원내총무가 되었다.
1960년불온문서·원면부정(原綿不正) 사건의 국회조사위원장,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참모를 지내며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4·19혁명 후 출범한 장면정권에 도전, 민주당의 신구파를 보수 양당으로
분당시켜 1961년 2월김도연과 구파 중심의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간사장이 되어 그 해 3월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초청한 청와대시국수습
4자회담에 참석하였다.
5·16군사정변 때에는 55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고, 1962년 박정희
(朴正熙)의 3·22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하였다.
민정이양이 된 1963년 5월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김병로(金炳魯)를
당대표로 추대하였고, 그 해 11월 전국구로 제6대 국회에 진출하였다.
1964년 언론윤리법안통과를 둘러싼 세칭 ‘사쿠라논쟁’으로 윤보선과
격돌하였다가 민정당의원 총회에서 제명되었으며,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6년 민중당 부총재가 되었고, 1967년 야당통합을 이룬 신민당 부총재
가 되었으며, 그 해서울 영등포에서 제7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70년 신민당 총재에 당선, 야당가의 총수가 되어 그 해 8월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가졌다.
1971년 총선에서 영등포지역구를 포기하고, 자신이 전국구 1번을 결정한
이른바 ‘진산파동(珍山波動)’ 때문에 총재직을 사임하였다가 다시 당권에
도전하여 1972년 총재에 재선되었으나, 불법전당대회에서의 당선이라는 이유로
법원에 피소되어 당수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수로 당선되어 같은 해 제2차 박정희·유진산
회담을 가졌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운명. 신민당장으로 충청남도 금산군 향리에 묻혔다.
▲ 이은상 작시, 김동진 작곡,조가(弔歌)
▲ 산소에는 비석도 없고 제단도 안보였다.
▲ 추도객들과 인사하는 유한열 총재님
▲ 이경희 19대 대통령 후보와 박종명(右) 필자
.
이번 제 19대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등록한 한국국민당 이경희 후보를
만나 기념촬영한 사진이다
이경희 후보는 법학박사에 사업가로 소개되어 있는데 전 서울시장 선거
에 후보로 나온 이력도 있고 이번 선거에서는 “통일이 답이다”라는 슬로건
을 내세우며 이번 선거에 임하고 있어 '통일맨' 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 산소에서 내려다 본 마을 모습
▲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 추도사 모습
▲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님과 박종명(左) 필자.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님은 올해 년세 85세 아직도 건강하신 모습이었지만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지 추도사를 하신 후 잔디위에 앉아 쉬시는 모습이
보이기에 함께 필자도 앉아서 기념으로 담아 본 사진이다.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님은 미국에서 재미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제 8대 국회에 신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참가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설치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입법위원으로
포함된 것을 계기로 민주정의당으로 이동하고제 5공화국 내각에도 참여했다.
제 15대총선에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7선에 성공하고 국회 부의장을
지냈으나,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 당권을 이회창이 잡게 되면서
이회창 노선에 반발해서 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안터넷 검색 내용 참조)
▲ 엄신영 목사의 추도 기도하는 모습
▲ 엄신영 목사와 박종명 필자
▲ 이경희 대통령 후보 인사모습
▲ 고 유진산 총재님 생가에 있는 연못이 아름다웠다
▲ 고 유진산 총재님 생가를 배경삼아 담은 기념사진.
▲ 생가 마당에서 점심을 드는 추도식 참석자들
▲ 술한잔 하시는 오세응 전 국회부의장님 모습
▲ 점심으로 준비한 육개장이 맛있었다
▲ 유한열 총재님 형수 홍락순 여사님과 박종명 필자
▲ 생가 안방에서 함께 식사하시는 유한열 총재
▲ 이희규 전 국회의원과 박종명 필자
자유한국당,제19대 대통령선거 특보단장으로 홍준표 캠프에 합류한
이희규 전 국회의원을 만나 기념촬영을 했다.
또한 이 전 국회의원은 ㈔한중도시우호협회 사무총장으로 취임했는데
이희규 사무총장은 단국대 사학과와 미국 롱아일랜드대학교 정치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으며, 이천시에서 3대 도의원과 16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면서
국제관계 전문가이자 정치인으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해 왔다.
이희규 총장은 그동안 쌓아 온 풍부한 국제활동 경험과 국정 경험을 토대로
한,중 지방정부와 정치인 교류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공개된 자료 참조내용)
▲구옥이 두채 있는 생가터는 넓은 마당에 봄꽃들이 만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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